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정말 “어떻게 하다 보니” 시작을 하게 됐어요.

군대에서 친구를 잘 만나게 돼서 비트코인이더리움에 대해 2014년 말부터 2016년 중반까지 매일 무료로 “수학적으로 완벽한 암호화폐”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어요.

2016년 6월 1일이 전역 날짜였고 그날 군인공제회를 통해 3년간 한 푼 두 푼씩 모은 돈이 입금되는 날이었습니다. 전역하기 6개월 전부터 다양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역 날이 가까워지면서 몇 가지 다짐을 세우게 됐습니다.

  1. 월급을 받으며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로 살지 않고 창업을 하면서 생존하는 법을 배운다.
  2. 군인공제회를 통해 모은 돈은 온전히 나의 금융교육을 위해서 투자한다.
  3. 1년 반 무료 강의를 제공하신 강사님이 바보는 아니시기에 일단 암호화폐에 대해 배워본다.

결국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다짐을 합쳐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백서를 읽어보고 전역한 그날 제 전 재산을 암호화폐에 털어 넣게 됐어요.

동시에 첫 번째 다짐을 실행에 옮겼어요. 그때는 춤을 한창 출 때였는데 주변 아티스트를 보면 모두 수입이 들쑥날쑥했어요. 그래서 학원에서 하는 대면 힙합 교육만 하는 게 아니라 콘텐츠를 만들어 아티스트가 더 지속 가능한 삶을 사는데 이바지하고 싶어서 그쪽으로 일도 시작했습니다.

힙합 교육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2016년 6월 18일 The DAO 해킹 사건을 겪으며 암호화폐 업계에 화려한 입학을 하게 됐습니다. 금전적 타격은 있었지만 창업 후 매일 일하기 바빴기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계속 틈틈이 공부는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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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콘텐츠를 후회 없이 열심히 만들었어요. 하루에 콘텐츠를 한두 개 정도 만들어 몇 개월간 계속해서 업로드를 하고 교육을 위장한 파티도 많이 열고 새로운걸 리서치하며 전 세계 우리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힙합을 바라보는 친구들과 소통을 했습니다. 결국 말만 하지 말고 만나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친구 3명이랑 40일 정도 미국 여행을 2016년 말에 다녀오게 됐습니다.

힙합의 아버지 DJ Kool Herc와 2016년 미국 Freestyle Session에서 한컷

미국에서는 삶에 대해 정말 다양한 교훈을 얻었고 단기간 많은걸 습득했기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역문화충격과 현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6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시내에서 놀다가 쌍방폭행에 휘말리게 됐어요. 2017년 1-2월 검찰청도 가보고 거기서 배상금을 물라고 해서 이더리움 트레이딩을 상대방에게 가르쳐주면 안 되겠냐고 말했는데, 당시 이더리움이 1만 원 밖에 안 했으니 어떤 눈으로 저를 봤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결국 150 ETH를 팔아 배상금으로 지불을 했어요.

주변 사람을 돕기 위해 12년간 몸을 담은 힙합이라는 산업에서 창업을 했는데 여러모로 서글펐습니다. 어느 날 어렸을 때 들으면서 자란 Ja Rule이라는 래퍼가 왜 힙합에서 테크로 넘어갔나를 설명하는 팟캐스트를 들었어요. Ja Rule왈 예술은 팬이 원동력인데 평생 갈고닦아 내 스타일이 한순간 반짝할 수는 있지만 주관성이 강하기에 반짝할 때 팬을 확보하지 못한 채 묻혀버리는 걸 경험하고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객관성이 있어 보이는 테크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툭 던진 말인 텐데 당시 인생 최저점에 놓여 있던 저에게는 울림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예술은 1대 1로는 사람을 바꿀 순 있지만 1대 다수로 세상을 바꾸기는 힘들고 예술가는 더더욱 죽고 난 뒤에 더 빛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바뀌는 걸 보고는 죽을까 싶었어요.

그때 당시 내 상황을 되짚어 보면서 솜방망이고 관대한 인간 법보다는 세상이 오히려 우리가 어느 누구도 임의로 되돌릴 수 없는 스마트 컨트랙트로 법을 짜면 어떨까 독선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지하철에 국비지원 프로그래밍 전단지가 많이 붙어있었는데 자바 프로그래머보다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짤 수 있는 인력을 키우는 거야 말로 미래에 세상을 가장 크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어요.

1월부터 2월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에게 비트코인을 처음 알려준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 테크에서 손을 뗀 지 12년이 됐고 매일 백서 읽고 팟캐스트를 들으면 암호화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장 내가 할 줄 아는 게 콘텐츠 만드는 거밖에 없어서 한국 사람을 위한 암호화폐 유튜브 채널이 없으니 가볍게 주 20분 정도 라이브로 이에 대한 대화를 송출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어요.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고 2017년 3월 9일 첫 방송을 하게 됐습니다.

이후 사건의 발단이었던 첫 방송

블록체인ers라는 유튜브 채널의 시작이었어요. 처음에는 부산-광교로 이원중계를 하다가 대한민국 최초 ICO 했던 회사에서 컨설팅 제의가 들어와서 광교 원룸에 다 큰 성인 남자 두 명이서 살면서 깨면 잘 때까지 블록체인 공부하고 밥 먹으며 산책하며 대화를 했어요. 그 당시를 생각하면 둘 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빠져서 정신없이 그걸 팠으니 행복했어요.

우리 둘 사이 수학과 프로그래밍 배경이 조금 있었으나 현역 엔지니어가 아닌지라 소프트웨어 대해 더 아시는 분들을 더욱 많이 만나고 싶었어요. 뜻을 같이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모이고 싶다는 욕심의 시발점이었죠. 유튜브 방송에서 “우린 이 기술을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뜻을 함께 하시면 연락 주세요”라고 겁도 없이 얘기를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유튜브 구독자가 1000명이 되면 서울과 부산에서 파티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파티 당일이 되니 3000명이 되더라고요. 라이브 방송하며 채팅창 혹은 댓글에서만 뵀던 분들을 직접 만나게 됐고 지금은 전 세계 블록체인 거물이 되신 분들도 당시에는 편하게 파티에 오셨어요.

1000명 파티 포스터

또 그때 파티에 온 친구 두 명. 한 명은 해커, 다른 한 명은 프로그래머였는데 이들이 원룸에 와서 함께 살기 시작했어요. 특히 프로그래머인 친구는 구로디지털단지에서 일을 했는데 퇴근하면 그 먼 거리를 택시를 타고 와서 집에서 같이 묵었어요. 무슨 생각에서 걔가 그랬을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하지만 드디어 기술적 질문을 물어볼 수 있는 식구가 생겨 너무 반가웠어요.

논스라는 명칭은 파티 이후 2017년 여름밤을 새우며 술을 마신 뒤 광교 맥도널드에서 맥모닝을 먹으면서 떠올렸어요. Number that’s used only ONCE. 난수고 임의 값인 논스는 블록체인에서는 블록이 채굴되도록 하는 ‘답’ 역할을 하고 블록체인을 가능케 합니다. 당시에는 멋져서 채택했지만 옹기종기 모여사는 우리도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많은 숫자 중 하나지만 핵심인 답과 같은 존재가 되라는 해석을 이후에 붙였고 논스가 시작됐습니다.